2015년 3월 31일 화요일

잘못된 SNS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느끼다!(루벤스의 그림 '키몬과 페로'를 보면서)



이 그림은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로마인의 자비)'다!
어떤 이들은 이 그림이 푸에르토리코 독립운동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 그림은 1630년작이며 푸에르토리코가 스페인에서 해방되고, 미국령으로 다시 편입된 것은 20세기 중엽이다.

따라서 너무나 많은 세월에 차이(약 200년)가 있다.

  한 편, 이 이야기의 원류가 되는 설화는 이미 로마시대에도 있었으며, 그 것이 조각으로 남을 정도로 유명했었다.



  위 작품은 베수비오화산이 폭발하기 이전에 폼페이에 서 만들어진 작품으로 폼페이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따라서, 굶주린 아버지에게 젖을 물린 효녀의 이야기는 이미 로마시대에서 부터 있었던 이야기이며, 푸에로 토리코 독립운동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 때부터 전해오던 전설을 누군가가 각색하였고, 그 이야기를 루벤스라는 작가가 그림으로 옮겼을 뿐인 것이다.
다음은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필자에게 어느 분이 보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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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인이 부끄럼도 없이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거의 벗다시피한 젊은 여인의 젖을 빨고 있습니다.

루벤스의 작품이며 제목은 'Cimon과 Pero입니다.

이 그림은 푸에르토리코 국립미술관 입구에 걸려있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서다가 이 그림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개 당황합니다. 딸 같은 여자와 놀아나는 노인의 부적절한 애정행각을 그린... 작품이라면서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포르노같은 그림이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나라 국민들은 이 그림 앞에서 숙연해집니다.

눈물을 보이기도 합니다.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저 여인은 노인의 딸입니다.

검은 수의를 입은 노인은 젊은 여인의 아버지입니다. 이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습니다. 독재정권은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넣고...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렸습니다.

'음식물 투입 금지'...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은 딸은 해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거운 몸으로 감옥으로 갔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지요!!!

그리고, 아버지를 보는 순간..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습니다.

이 '노인과 여인' 그림은 ..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애국심이 담긴 숭고한 작품입니다.

하나의 그림을 놓고 어떤 사람은 '포르노'라고 비하하기도 하고, '성화'라고 격찬하기도 합니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지만...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진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남을 비난하곤 하지요! 그러나, 진실을 알면 시각이 확 바뀔수 있음을...

사실과 진실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니까요!

눈에 속지 말고, 귀에 속지 말며 생각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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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SNS는 정말 무섭다!!!!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감동을 너무 받은 나머지 꼼꼼한 검증절차를 무시한 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도무지 요즘엔 한가지 잘못알려지면, 인터넷에 의존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 것이 진실인냥!! 그대로 퍼져나가기만 하는 일이 너무 많다. 

때문에 SNS(인터넷)글을 읽을 때 좀 더 꼼꼼히 따져가며 읽을 필요성을 느낀다.

#참고로 시몬과 페로 이야기는 성경에도 나온다고 하는데, 필자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으시는 분들은 성경을 확인해주길 바랍니다. 댓글로 성경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5년 3월 23일 월요일

대마도는 우리 땅!(김민국) - 대마도는 우리 땅으로 살았던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오늘은 몇 일 만에 시청에 나갔었다. 평소에도 가까운 곳이라서 자주 그 곳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도 쓰고, 영화도 보러 자주 가는 곳이다. 그런데, 수요일인데도 시청 앞 광장에서 노동자들이 집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청 정문 앞에 사진에서 처럼 대마도는 우리 땅 이라고 쓰인 글귀가 보였다.

  역사에 대해선 꽤나! 관심 많은 나도 조금은 쌩뚱맞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꼭 틀린 것만은 아닌 것도 사실이다. 대마도에 관해 조금 밖에 모르는 나도 조선시대 세종때 '이종무'장군이 대마도 정벌을 했으며, 역사기록에도 대마도를 '계림의 땅'이라고 인식하였고, 계림은 '신라','경상도'를 이르는 우리나라 말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대마도주가 대마도를 조선에 편입시켜 줄 것을 요구해 조선에서 '태수'로 봉하고 대마도 유지들을 '만호'로 임명해 조선땅으로 관리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반독립적인 상태에서 임진왜란 이 전까지 조선과 일본의 중개무역으로 번성하다가 일본이 '오다노부나가'가 거의 통일을 이루고 그 의 신발 신켜주는 하급 무사 출신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일본의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은 더 욱 막강해졌고, 반대로 조선은 '붕당정치'가 막 시작이 되면서 '대마도'에 대한 영향력은 더 욱 약해졌었다, 때문에 임진왜란 때에 조선침략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7년 전란이 끝나고, 대마도는 형식적으로는 일본의 쇼군의 영향을을 받는 상황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조선무역과 대일본무역의 중개지로서 다시 반독립적인 상태로 돌아가서 중개무역으로 번성하였다.  일본이 대마도를 실질적인 영토로 완전히 복속한 것은 '명치유신' 때이며, 그 것은 '오키나와' 합병과 거의  같은 시기의 일인 것을 생각해 볼 때 대마도가 일본땅으로 존재한 시간 보다는 우리나라 땅으로 존재한 시간이 훨씬 더 긴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