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천의 사람나라 49강
탕탕절을 아십니까 1
1. 김재규와 탕탕절이 뜬다
1) 김재규요!
젊은이 2명 식당에서 밥 먹다가 뺨따구 맞을뻔한 사연 [17]
불광동휘발류 (tjdnt****)
주소복사 조회 1875 14.04.24 15:24 신고
아는 동생이랑 식당에서 밥먹으면서
세월호 이야기를 하며 반찬삼아 박씨를 씹고있었죠
그런데 옆자리 아저씨가 오시더니
“젊은 노므새끼가 뭘 안다고 개소리야! 니가 지금 누구 덕에 잘먹고 잘사는줄알아!?”
라며 쌍욕을 하시더라구요
참고로 지역..구미.. 뭐 광신도 첨만나보는것도 아니고 해서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김재규요”
라고 했는데 아저씨 피꺼솟
제가 뭐 잘못했나요
2) 탕탕절 이야기
탕탕절 10월 26일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두 번의 총격사건
-레몬박 기자 2015.10.26 14:47
오늘 10월 26일 그런데 오늘을 사람들이 탕탕절이라고 하며 탕수육이나 설렁탕 같은 탕을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고급 양주인 시바스시갈을 마시며 탕수육을 안주로 먹어야 한다네요. 10월 26일 도대체 무슨 날인데 이 날을 탕탕절인가 하고 알아봤더니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더군요.
첫째는 도마 안중근 의사가 일본 내각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사건입니다.
-중 략-
두번째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의 총격으로 죽은 날입니다. 이른바 십이륙사건이라고도 합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5.16쿠데타로 집권하여 유신독재체제를 이룬 후 그의 최측근에 의해 살해당한 것입니다.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 대통령 각하는 나에게 동향 출신으로, 은인이며 상관이다. 친형제 간도 그럴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관계다. 그러나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쿠데타로 집권하고 10월 유신을 통해 독재정권을 지향하였으며, 헌정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와 새마을운동 등으로 이 나라의 경제를 살렸다는 경제대통령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그의 공을 더 인정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1위에 꼽혔지만, 이러한 긍정적 평가는 점점 하락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실례로 2008년 가장 업적이 큰 대통령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73%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 지지도는 매년 추락하더니, 2014년에는 31%로 노무현대통령과 1%차이로 우세하다, 2015년에는 28%로 32%의 지지를 얻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그의 평가가 계속 하락하고 있는 이유는 19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 이후 1978년 10월 31일 미 의회에 제출된 프레이저 보고서 등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비밀문서들이 공개되고, 또 일제 때 만주국 중위를 지낸 친일이력, 그리고 그의 딸이 다시 대통령이 되었지만 계속되는 실정으로 국민적인 실망을 주면서 그의 평가도 함께 추락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 략-
이것이 두번째 10월 26일의 총격사건입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비 총격 사살과 김재규 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총격 사살 공교롭게도 10월26일에 이 두 번의 총격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탕탕절이라며 시중 중국집 탕수육 주문이 이어져 중국집 사장님들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하네요.
3) 김재규와 탕탕절을 띄운 최고 공로자는?
①최태민 ②최순실 ③박정희 ④박근혜
2. 극과 극, 박정희와 김재규
1) 어린 시절 : <왜놈 급장 vs 순사에 대항>
(1) 박정희 : 악바리 왜놈 급장
돌이켜보면 박정희는 귀엽고 예쁘게 생긴 친구였지요. 그런데도 학교 다닐 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습니다. 성품이 몹시 독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별명이 ‘악바리’ ‘대추방망이’였지만 함부로 그렇게 부르지도 못했어요. 공부도 잘했고 해서 아이들이 그를 두려워했던 겁니다. 일본인 교사들도 그를 귀여워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박정희가 급장을 지냈던 3학년때부터 6학년 때까지 급우들 가운데 그로부터 맞아보지 않은 아이들이 드물 정도였습니다. 동급생들보다 키가 작았던 박정희는 겁도 없이 말 안 듣는 아이들이 있으면 체구나 나이가 위인데도 뺨을 후려갈겼어요. 반에서 가장 키가 컸던 권해도(權海島)는 박정희보다 한 뼘 이상 키 차이가 났고 장가까지 들었는데 교실에서 뺨을 맞아야 했습니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보듯이 권군의 뺨을 때리던 박정희의 모습을 생각하니 지금은 웃음이 나와요. 늘 냉엄한 표정인 정희에 대해 아이들은 가까이하기를 어려워했어요.(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 353~354쪽)---학급천황-교실폭력
(2) 김재규 : 조선사람 괴롭히는 순사에 대들다 유치장 간 아이
그는 어느날 책보를 메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시장 나무전에서 일본인 순사가 나뭇군에게 발길질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는 것이다. 발을 멈추고 보고 있노라니 순사는 당시 15전 하는 나뭇짐을 5전을 줄 터이니 팔라고 강요하고 이에 못이겨 나뭇군은 그렇게 하기로 했는데 또 자기 집까지 운반해 가라는 것을 나뭇군이 거절하니 그 순사나리가 노발대발하여 발길질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에 일본 순사들의 권세를 생각할 때 이 정경은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르나, 그것을 보고 있던 소년 김재규는 의분을 참지 못하여 순사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본 말로 <도둑놈 자식>이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체면이 엉망이 되어버린 순사는 나뭇군을 제쳐놓고 홍안의 소년의 덜미를 부여잡고 경찰서로 끌고가 유치장에 넣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정식,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 人間 金載圭(1980), 12~13)
2) 청년 시절 : <일본의 개 vs 국군 장교>
(1) 충성혈서 : 자발적 ‘일본의 개’
대한민국임시정부(1919~1945) 21년(1939)
滿洲新聞 7면에 <혈서(血書) 군관지원-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라는 제목의 4단기사(3월 31일)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와 함께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넣은 서류로 송부되어 계원(係員)을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일반적인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두렵지만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에 채용시켜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 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중 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① 충성혈서-일본의 견마 자임
② 패망전 투항 탈출→패망→광복군 갈아타기
③ 입대-남로당 최고 책임자
④ 몽땅 배신→무기→감형→석방→복귀
(2) 명예면관(名譽免官) : 미군 떼거리 물리친 ‘대한 청년’
그러나 김재규의 장교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1947년 6월에 그는 건군이래 처음으로 명예면관조치를 받고 하직하여야 했다. (중략)친척들이 당시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기에는 그가 대전에서 일직사관으로 근무하던 중 시내에서 한국경비대 사병들과 미국인들 간에 격투가 벌어졌는데, 한국 사병들이 영내로도피하자 그들을 추적하던 미국 병사가 영문에 다가와 시비를 하게 되니 일직사관인 김소위가 그를 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가 불통하는 한국장교와 대하기에 성급한 그 미국 군인은 김소위에게 갑자기 권총을 겨누었다. 권총으로 위협을 당한 김소위는 순간적으로 그가 휴대하고 있던 일식 장검을 빼어들고 그 군인에게 대항하였는데 겁을 먹은 미군인은 권총을 떨어뜨리고 두 손을 바짝 들어버리고 말았다. 미 군정 하의 국방경비대 사관이 일본도를 차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와서는 상상하기 어려우나 그 당시에는 장교들의 제정된 복장이 없었고 미식 무기도 없어서 장교들은 일본군의 장교 복장에다 장화, 일본도 또는 지휘도를 찼으며 자동차도 없는 관계로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부대의 훈련이나 내무생활까지도 일본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사건이 이렇게 되다보니 경비대 측에서는 난처하게 되어 김재규 소위를 명예면관토록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즉 경비대의 위신과 대원들의 긍지를 고려할 때 그가 대항한 것은 옳은 일이로되 미군정하에서 미국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불명예제대가 아닌 명예면관이라는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한다.(역사적 사건의 주인공 人間 金載圭, 16쪽)
① 미군정 시기 미군을 혼내준 죄→1947년 6울 1일, 중위 진급 예정일에 명예면직
② 김천중, 대륜중에서 체육교사
③ 군정 끝나고 정부수립 후, 1948년 10월 소위로 복직
3) 교육관-권력 행사 : <영남대 탈취-사유화 vs 선산중학교 헌납-공립화>
(1) 박정희 부녀 : 영남대 탈취-사유화
*박정희의 대구대, 청구대 강탈
**청구대학 : 1967년 6월 15 신축공사 붕괴사건을 계기로 진상의 형식으로 빼앗음
**대구대학 : 삼성 이병철이 사카린 밀수사건을 무마해주는 대신 빼앗음
*대구대+청구대=영남대학교(67년 12월) **청와대의 주도 하에 왕립대학으로 탄생 : 100만평(당시 최대 규모) **박정희 사유물→박근혜 이사장
*유신대학 : 교주 박정희, 수령 박근혜---교육의 사유물화
**박근혜 이사장
**1981년 정관 제 1조 : “교주(校主) 박정희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이사장 사퇴 후 : 이사 7명 중 4명 박근혜가 임명
**유신대학 창학정신 : 학교 강탈→사유물화→독재자 찬양(새마을정신)
(2) 김재규 부자 : 사립학교 건립→헌남-공립화
① 선산중학교 공립 헌납---p.11~12
*1946년 6월 11일 : 선산중학교 설립 인가
*1946년 9월 25일 : 선산중학교 개교
*1966년 3월 1일 : 공립 중·고등학교로 인가(김재규 방첩부대장→보안사령관)
*1973년 3월 1일 : 선산여자중학교 분리
*2014년 3월 1일 : 선산중학교·선산여자중학교 통합
*2015년 2월 13일 : 제66회 졸업식(누계 남 15,245명, 여 5,078명)
*2016년 3월 2일 : 제70회 입학식(입학생 112명)
② 중경고등학교 설립(1967년)
*1967.12.13 : 學校法人 中京學園 설립 허가
*1970.03.10 : 개교(24학급)
*1982.03.01 : 공립 일반계 고등학교로 개편
4) 자식 교육 : <유신 공주 vs 조용한 결혼식>
(1) 유신 공주 박근혜
1979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최태민이란 자가 사이비 목사이며 자칭 태자마마라고 하고 사기횡령 등의 비위사실이 있는 데다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런 일은 아무도 문제삼는 사람이 없어서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드니 박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까지 하나, 하면서 반문하길래... (중략) 최태민이란 자를 총재직에서 물러나게는 했으나 그 후 알고 보니 근혜가 총재가 되고 그 배후에서 여전히 최태민이 여성봉사단을 조종하면서 이권개입을 하는 등의 부당한 짓을 하는데도 박대통령은 김 피고인의 큰 영애도 구국여성봉사단에서 손 떼는게 좋습니다, 회계장부도 똑똑하게 해야합니다란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도 있어서 대통령 주변의 비위에 대하여 아무도 문제삼지 못하고, 또 대통령 자신 그에 대한 판단을 그르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항소이유서,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1980), 87~88쪽)
죽은 최 목사가 그녀의 인성 형성기에 박근혜의 몸과 영혼을 완전히 통제했으며, 그런 결과로 최태민의 자녀가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위키리크스 폭로, 2007년 7월 20일 버시바우 본국 보고문건 ROK PRESIDENTIAL ELECTION: STILL THE POLITICS OF THE VORTEX)
① 유신 공주(令愛)→영부인→유신체제 2인자 역할
### 이 시기 북에서도 김정일을 유일체제 2인자(신위 계승자)로 키우기 시작
② 개판나라 : ‘한국판 라스푸틴’ 최태민이 박근혜 이용 권력남용, 부정축재
③ 박정희도 손도 못 대는 최태민=교주!!!
(2) 건설부장관 무남독녀의 조용한 결혼식
김재규는 특히 이권에는 절대 간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가족들은 얘기하고 있다. 가만히 놔두면 될 일도 부탁하면 안됐다고 한다. 그가 중앙정보부장이 됐을 때 건설업을 하는 동생에게 “내가 정보부장을 그만두든지, 네가 사업을 그만두든지 양자택일 하라”고까지 해, “형님 벼슬하는데, 나는 굶어죽으란 말이냐?”는 항의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그가 보안사령관에 취임할 때까지 삼선교에서 쌀집을 내고 있었다. (중략) ---사례들 소개
그 ‘결벽증’은 외동 딸의 결혼에서도 나타난다. 그가 건설부장관시절 미국에 유학한 딸 수영이 결혼했는데, 그는 딸이 귀국해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반대하여 미국에서 조용하게 결혼식을 올리도록 했다. 그뿐 아니라 자신은 물론 부인도 참석을 못하게 하고, 미국에 있는 친척들도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식장에 참석한 신부측 친척은 해외의 건설현장에서 귀국길에 들렀던 삼촌 항규씨 뿐이었다. 고관의 자녀가 결혼할 때, 그것도 대기업체의 사업과 직접 연결되는 건설부장관의 무남독녀가 이처럼 ‘쓸쓸하게’ 결혼식을 올린 것은 의외라면 의외의 일. (김대곤, 김재규 X파일, 168~169쪽)
*신군부 부정축재자 몰이 : 자개상 하나에 3천만 원
5) 악마(악마적 이기주의자) vs 의인(대인) : 다음 강의
3. 인간 김재규
*이정식(1931~), The Life of Kim Jae Kyu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 人間 金載圭(1980) *펜실베니아대학 교수
*<The Politics of Korean Nationalism>(1963), *<김규식의 생애>(1974)
*<Revolutionary Struggle in Manchuria:Chinese Communism and Soviet Interest,
1922~1945>(1983), *<Japan and Korea:The Political Dimension>(1985)
*공저 : 스칼라피노∙이정식 <Communism in Korea>(1972) *자료집 <Materials On Korean Communism 1945~1947>(1977), 대담 자료집 <혁명가
들의 항일회상>(1988)
1) 정직한 사람
*재미 김재규 가족, 친지, 지인, 변호인 취재(79 말~80.2)
이러한 방법으로 필자의 초고가 끝났을 무렵 국내에서 김재규 피고의 항소이유서를 입수하게 되어 친지들이 말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대조하고 보충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항소이유서를 읽으면서 놀란 것은 김재규씨의 친지들이 기억을 더듬어 말한 옛날 이야기들의 대의가 거의 김피고의 항소이유서의 내용과 부합한다는 점과, 친지들이 기억하고 있던 일화들이 여러번 항소이유서에도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 人間 金載圭, 머리말)
2) 의인 : 의협심이 강한 사람
(1) 일본 순사에 욕설
(2) 시위 비폭력 대응
(3) 청렴결백한 공직자 : 원칙+‘결벽증’
(4) 중앙정보부장 시절 민주세력 지원
3) 대단한 효자
그는 아침 저녁으로 부모에게 꼭 문안을 드리고 그날의 일어난 좋은 일이 있으면 전해드리고 부모의 옷, 이불 등의 색깔까지 보살피고 어디에 출타하였다가 돌아올 때면 꼭 부모님께 선물을 가지고 오는 등 극진한 효자의 덕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10.26사건으로 구금된 후에도 생존하신 모친에 대해 각별히 염려하며 지나고 있다고 전한다. (역사적 사건의 주인
공 人間 金載圭, 13쪽)
4) 살생을 금기시하는 불자
재규의 모친은 독실한 불교신자이므로 재규도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불교의 첫째 신조가 살생에 대한 금기였으므로 그는 군인이 된 후에도 무자비하게 살생하는 지휘관들을 퍽 싫어했다고 한다.
(중략)
따라서 그이 친지들은 김재규 씨가 박대통령을 살해하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 씨를 살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믿으려고 하지 않았고 이 사건이 있은 후 재규의 노모는 평생해 오던 불공들이기를 중단하였다고 한다.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 人間 金載圭, 13쪽)
(1) 살생금기 신념 때문에 미 8군 사령관이 준 엽총 선물 지인에게 준다.(항소이유서)
(2) 6.25 때도 “직접처분 같은 것으로 사람을 죽인 일이 없다”(항소이유서)
(3) “이번 혁명에서 처음으로 사람을 희생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피고인이 오죽하면 동향출신이고 동기생인 대통령을 희생시키게 되었겠습니까. 피고인이 민주회복을 위하여서는 대통령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 때문이었습니다.”(항소이유서)
5) 안목-능력 있는 장관 : 건설부장관
(1) 한국경제 치료제 달러→중동 진출
그러나 건설계에 문외한이던 김재규는 2년 3개월간의 재임 중 건설마술사(construction wizard)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 칭호는 누가 부여했는지 모르겠으나 1979년 12월 22일자 뉴욕타임즈(NewYork Times)기자가 쓴 것을 보아 그의 재임 시에도 그랬을 상 싶다. 사연인 즉 김재규씨는 건설부장관으로서 중동산유국가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한국건설업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막대한 액수의 외화를 획득함으로서 유류 가격등에 의한 한국경제의 위기를 모면케 한 것이었다.
(중 략)
1979년 12월 암살사건의 피고로 나선 김씨는 법정에서 진술하기를 자기가 장관으로 취임한 달인 74년 9월에 재무부장관 김용환씨로부터 3천만 달라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 외채의 원금과 이자를 지불해야 할터인데 국고의 외채보유액이 바닥이 났다는 것이다. 그래 자기가 생각하기를 지금 우리는 한국의 경제라는 병자를 치료하려면 달라라는 약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그 약은 산유국인 중동국가에 가야 얻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고 중동에의 진출을 추진하였다는 것이다.(New York Times 1979년 12월 22일)
(2) 중동진출 성과
① 1973년 중동 전계약고 : 2천 4백만 달러
② 1974년 계약고 6천 9백만 달러
③ 1974년 9월 건설부장관 취임
④ 1975년 8억 5천만 달러 : 74년의 12.3배
⑤ 1977년 34억 달러
⑥ 1978년 90억 달러
(3) 탁월한 실사구시 인물
① 탁월한 현실인식(중동 주목-안목), 실행능력을 갖춘 인물
② 신군부-언론이 만들어낸 ‘저돌적 성격’, ‘무능한 인물’과 정반대
③ 최고의 실사구시 : 박정희 사살→자유민주주의 회복+‘국민 희생’ 차단
6) 인간 김재규 : 훌륭한 인격자
그의 인격을 평가함에 있어서 우리는 위에서 지적한 몇가지 사례를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중앙정보부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2년 10개월이나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일반 시민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는 일, 중앙정보부장으로써 중요기관의 기관장이면서도 자기기관의 업무를 축소시키려고 노력하여왔다는 일 등은 무언중에 김재규 씨의 인격과 그의 성향을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10.26거사 후에 공모자로 재판을 받아 온 부하들이 한결같이 김재규 씨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였다는 일, 그리고 그처럼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기관의 책임자로 거의 3년간이나 있었는데도 부정을 하였거나 치부한 증거가 전연 나타나지 않았다는 일, 그리고 과거에 거의 측근으로 일을 하여온 인사들이 한결같이 그를 칭송하였다는 일 등은 인간 김재규가 덕망이 높은 인격의 소지자라는 결론을 가지게 한다.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 人間 金載圭, 64쪽)
4. 두 개의 10.26, 안중근과 김재규
*10.26 24주년 기념 토론회(04.10.26.) : <10.26의 역사적 평가-안중근과 김재규의 비교 검토->
*김재규 의사 서거 25주년 기념 인터뷰(05.5.24) : <김재규 의사가 대한민국을 구했다>
*시대의 창 <최상천 인터뷰> 책 출판 거절---‘진보’로부터 참 많이 거절당했다. *그래도 10년 사이 재법 많이 변했다 : 박정희-박근혜 거부-저주, 김재규 긍정평가
1) 70년 간격의 두 10.26
(1) 1909년 10.26 :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
(2) 1979년 10.26 : 김재규의 박정희 사살
(3) 공통점
① 권총으로 당대 최고 권력자 살해
② ‘졸속 재판’을 거쳐 처형 : 안중근은 사건 5개월 후인 이듬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김재규는 사건 후 7개월이 채 안 되는 1980년 5월 24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처형
2) 극과 극의 평가
(1) 안중근의 10.26 : 의거(義擧)
① 사건 평가 :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최고의 민족운동-독립운동’
② 안중근 평가 : 의사(義士)
③ 안중근은 김구와 더불어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인물 :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그의 서예작품들이다. 특히 그의 손도장과 ‘大韓國人 安重根’ 휘호는 자동차 뒤에다 붙이고 다닐 만큼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2) 김재규의 10.26 : ‘내란목적 살인 사건’
① 사건 평가 : ‘내란목적 살인 사건’
② 김재규 평가 : 살인자, 배신자, 시해범
③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가 그의 신원을 위해 활동하고 있지만, 명예회복이나 기념관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다. ‘김재규 의사 기념관’ 대신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옆에는 ‘박정희 기념관’이 세워지고, 구미는 ‘반신반인’ 박정희 유령이 지배하고 있다.
3) 역사적 차원,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자!
(1) 전혀 다른 평가의 기준-차원
① 안중근은 민족사 차원에서 ‘평가’
② 김재규는 실정법 차원에서 ‘심판’
③ 김재규에 대해서도 실정법의 심판이 아니라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다.
(2) 역사 차원의 평가
① 실정법 차원을 넘어서자
② 정치∙당파∙민족 차원을 넘어 인간 해방, 역사 발전 차원
(3) 두 가지 평가기준
① 거사 목적과 방법은 정당했는가?
② 거사 결과가 역사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4) 거사의 목적과 방법
(1) 안중근의 10.26
(가) 거사의 목적 : 역사의 물줄기를 제국주의에서 평화공존으로 바꾸기 위한 비상조치
① 조선민족 차원 : 침략과 주권 침탈 ‘원흉’을 응징해서 ‘민족의 원수’를 갚는 것
② 동아시아 차원 : 침략전쟁의 주모자를 제거해서 동양평화를 이루는 것
③ 일본의 침략전쟁을 기획∙주도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죽임으로써 ‘침략전쟁 반대와 동양평화 실현’의 의지를 세계만방에 과시하고 독립정신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나) 일본 극우의 ‘테러리스트’ 논리
① 정반대의 폭력
*침략 : 주권 부정/강탈, 이권 약탈을 위한 폭력---강자의 일방적 폭력
*테러 : 반침략, 주권 수호/회복, 평화공존을 위한 폭력---약자의 반침략 폭력
② 전술적 선택 : 반침략전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인 저항방법
③ 테러 부정은 침략주의자의 시각 : 너는 내 맘대로! 가만히 있어라!
(다)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 최선의 선택이었는가?
① 안중근의 10.26은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지만 일시적 충격요법일 뿐
② 이토가 안중근의 총에 죽은 것은 우연
10월 20일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 편으로 지나간다는 정보를 듣고 6일 후에 저격을 결행한 것이다. 만약에 계획대로 우덕순이 채가구 역에서 먼저 저격을 했다면, 성패에 관계없이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지도 못했고 의사로 평가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10.26의 역사적 평가)
(2) 김재규의 10.26
(가) 다섯 가지 목적(최후진술)
① 자유민주주의 회복 : 헌법 제1조 실현의 핵심 과제
② 국민의 희생 방지 : 국가의 1차적 존재 목적
③ 적화 방지 : 공산화→독재 예방도 정당
④ 한미관계 회복 : 당시 최고의 국제-안보 과제
⑤ 한국인의 명예 회복 : 조선을 보라!
(나) 방법 : ‘박정희=유신’제거 외에 자유민주주의 회복의 길이 없었다.
① 김일성과 박정희 야합 : 남북에 조폭체제=천황체제 완성
② 국가 위에 중정,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 국민=반공우리/주체우리/병영체제-물샐틈없는 안보체제, 박/김=영도자
③ 국민/인민의 짐승/로봇화 완성 : 개돼지 프로젝트
④ 완벽한 폭력-감시체제
⑤ 저항-몰살작전
⑥ 박정희 제거 없이는 자유민주주의 회복 불가
5) 역사에 미친 영향
(1) 안중근의 10.26 : 실질적인 영향은 별무
① 꺼져 가던 항일의병전쟁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고,
② 일본의 침략, ‘한일합방’을 막는 데는 기여 전무
(2) 김재규 10.26 : ‘유신 핵’ 제거→유신체제 붕괴→자유민주주의 길
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민주공화국의 길을 열었다.
② 시민 대학살을 막았다.
③ 북조선-김일성 천황체제 코스 차단
④ 민주화 실패의 책임 : 신군부, 양김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유신체제의 핵을 폭파한 역사적 사건이다. 김재규가 최후진술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회복을 20~25년 앞당겼다”고 주장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겸손하다. 만약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보기에는 김일성의 주석체제처럼 박정희의 죽음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지금쯤 박근혜 여왕을 모시고 살면서, 일년에 한차례 박정희 궁전에 참배를 드리면서 대성통곡하고 있을 가능성이 70% 정도는 될 것이다.(10.26
의 역사적 평가)
6) 재평가 필요 : 다음 강의
*최상천 지승호 인터뷰(2005) <김재규 의사가 대한민국을 구했다>
*김성태 엮음, 의사 김재규-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을 개척한 혁명(매직하우스. 2012)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