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천의 사람나라 50강
탕탕절을 아십니까 2 : 10.26 혁명
軍門을 떠나면서
一九七三年 三月 六日
軍團長 中將 金載圭
1. 유신, 오카모토 천황체제
1) 악마적 이기주의자 : 전대미문 5대 수괴
(1) 반민족 수괴
① 충성혈서, ‘일본의 견마’ 맹세
② 광복군 행세
③ 한일협정 뒷돈,
④ 일제 피해자 개인청구권 박탈
(2) 반국가 수괴 : 대한민국/민주주의 파괴→국가 사유화→반인륜 범죄
① 군내 남로당 수괴(사형-총살)
② 5.16 군사반란(총살)
③ 삼선개헌
④ 유신=오카모토 천황체제
⑤ 반대자에 대한 악행 : 빨갱이 사냥, 테러, 고문, 살해 ; 장준하, 김대중, 운동권
(3) 강탈 수괴
① 베트남전쟁 전투수당 500불→50불
② 정수장학회 : 서울-부산 MBC, 부산일보, 영남대
③ 구로동 토지 강탈
(4) 반인륜 수괴 :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쳐버린 악마
① 가족 외면 : 사범학교 진학 이후 어머니 외면, 봉급 독식, 형 박상희 죽음 외면
② 왜놈 급장-친구 패기
③ 최악의 동지배신 : 남로당 동지 300명 명단 넘기고 구명
④ 간첩 조작-살해 : 인혁당 사건, 어부 간첩단 사건, 유럽 유학생 간첩단 사건, 동백림 간첩단 사건,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등
(5) 강간 수괴 : 최악의 강간, 가정 파괴 : 배우 김삼화 등 200여 명 성폭력
2) 오카모토 천황체제로 가는 길
(1) 국가 위에 중앙정보부를 올려놓는다. : 대한민국→중정감시망
(2)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을 올려놓는다. : 민주공화국→반공국가
(3) 물샐틈없는 안보체제(병영국가-반공우리-세뇌) : 주권자→국민→신도화, 가축화, 로봇화
① 신도화 : 반공미신교, 박정희교 신도
② 가축화 : 사냥개(중정, 검찰, 경찰, 보안사, 군대), 애완견(공화당, 공무원), 개∙돼지(국민, 반공우리)
③ 로봇화 : 반공로봇, 애국로봇(충성혈서→충성맹세)
(4) 반국가 수괴→영도자=주권자=수령
① 20세기 기독교 : 박&김의 사탄놀이, 빨갱이사냥, 종북몰이
② 반국가 수괴=독재자→‘국민 수호 영도자’→주권자
3) 쌍둥이 천황 탄생
(1) 데탕트 악용 : 사탄놀이 위기
(2) 7.4 공동성명 :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야합
(3) 1972년 12월 27일 쌍둥이 탄생 : 유신, 유일
4) 천황주권 컨베어시스템
(1) 행정 시스템 : 박정희→정부→지방행정단위(시∙도-시∙군-읍면동)→반상회→주민등록자
(2) 군사 시스템 : 박정희→군/예비군/교련/민방위
(3) 천황주권 전위 : 중앙정보부 : 행정, 법원, 언론, 대학, 기업 등 전방위 감시∙통제
2. 김재규의 모순
1) 박정희와 김재규
(1) 동향(구미, 선산), 동기(조선육상경비대사관학교=육사 2기)
(2) 개판 동행
① 자칭 ‘일본의 개’→군사반란(총살)→삼선개헌→유신(국가 사유화)
② 김재규는 ‘박정희의 개’(방첩부대장→보안사령관, 66.2~71.9)
*유신 이전, 1971년까지는 김재규는 박정희 지지
*방첩부대장-보안사령관(66.2~71.9) 시절은 ‘박정희의 사냥개’ 노릇 : 71년 박정희-김대중 대결에서 박정희 승리 위해 서승 서준식 형제 포함 제일동포간첩단 사건 날조
(3) ‘박정희의 사냥개’(~71)→박정희 사살(79) : 배신인가 혁명인가?
2) 장기집권 반대
(1) 3선 개헌 반대 : 정구영, 양순직 증언
(2) 71년 대선 박정희에게 ‘이번이 마지막 선언’ 요구
(3) 장준하(1918~1975.8.17)와 함께
① 의기투합 : 박정희 정체를 가장 잘 아는 두 사람
② 구속된 장준하 가족 지원 : 중정 차장, 보안사령관 시절 가게 얻어주고 양식 제공
③ 75년 8월 20일 거사 준비? : 8월 17일 의문사
장준하는 1975년 들어 평소 잘 만나지 않던 김대중과 만나고, 함석헌·홍남순과 접촉하며 8월 15일, 광복절 30주년을 맞아 모종의 거사를 계획했다. 마침 김영삼이 동남아 여행중이라 그가 귀국한 뒤인 8월 20일으로 계획은 연기되었다. 장준하의 아들 장호권은 이 당시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일’이 계획되고 있었으며, 장준하가 “박정희를 깨는 것은 민중의 힘으로 역부족이니 게릴라전으로라도 박을 제거해야 한다. 군부 쪽에도 상당한 연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고 증언한다. 또한 1976년 4월에 자신이 테러를 당했을 때 주한 미 대사 하비브가 찾아와 “당신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 이뤄질 터이니 몸조심하고 기다려라”고 했다고 한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장준하는 재야와 야당 전체를 아우르고 군부 일부가 동조하는 어떤 거사를 계획중이었으며, 여러가지 증언으로 미루어 8월 20일 경으로 예정된 것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장준하는 국회의원 재직 시절 사적인 인연이 있던 김재규와 만났는데, 당시 2군단장이던 김재규는 장준하의 국방에서 의정활동과 청렴상에 감동하여 장준하의 죽음 이후 박선호를 시켜 가족들을 돌봐주었다. 1976년 말, 김재규는 장호권을 남산으로 불러 “부친의 사망사건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말해주고, 10·26 3개월 전에는 미국에 나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미국행을 권유했다. 2005년 11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장호권은 장준하의 계획에 포함되었던 군내 동조 세력이 김재규 등이며, 10·26도 장준하의 영향을 입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였다. (위키 백과)
(4) 71년 장충단공원 유세 : 박정희 ‘이번이 마지막 출마’ 선언 권유(이정식 p.25)
(5) 유신 반대와 살해 결심 : 항소이유서
피고인 김재규가 유신헌법을 폐기하고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키고저 결행한 이번 거사의 결심은 유신헌법의 공포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2.12.27.유신헌법이 공포되었을 때 피고인은 3군단장으로 있으면서 유신헌법을 두세번 읽어보니 이 헌법은 대통령이 영구집권하려는 헌법이지 민주헌법이 아니구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중 략)
그 때 피고인은 3군단 사령부의 울타리를 만들면서 박대통령이 군단에 방문할 것을 예상하여 통상 울타리를 만드는데 밖에서 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형태를 취하는 것인데도 일단 사령부에 들어온 사람은 밖으로 나갈 수없는 이례적인 형으로 울타리를 만들게 한 사실도 있었다는 것이고...(10∙26재평가와 김재규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83~84)
3) 유신 참여
(1) 유정회 국회의원(1973.3~1973.12)
(2) 중정 차장(1973.12.20~1974.9)
(3) 건설부장관(1974.9.18) : 2년 3개월
(4) 중앙정보부장(1976.12.4) : 2년 10개월
4) 박은 왜 김재규를 중정부장에 임명했나.
(1) 신직수, 박정희의 사냥개 : 정치공작-고문 본부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법률고문
1961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1963년 중앙정보부 차장
1963년 12월 ~ 1971년 6월 검찰총장(7년 6개월)
1971년 6월 ~ 1973 12월 법무부 장관(2년 6개월)
1973년 12월 ~ 1976년 12월 제7대 중앙정보부장(3년)
2001년 사망
① 신직수 중정 차장, 검찰총장, 법무장관, 중정부장 거치면서 최악의 용공조작, 살인 :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② 미친 유신정권 : 마구잡이 구속, 동아일보 광고 탄압, 고려대 긴급조치 7호(75.4.8)
③ 인혁당 사건 : 사형(4.8)-처형(75.4.9)
④ 중정 낀 밀수 사건 : 3개월 조사, 구속 324명, 밀수 총액 22억 원 어치
(2) 체제 위기 : 사면초가 박정희
*1991년 11월 29일자 <중앙일보>
*악질 중앙정보부장 신직수 사위 홍석현이 회장으로 있는 <중앙일보>에 실린 기사
① 국회의원 고문 폭로 회견(75.2) : 유신 직후(1972.10.27) 박정희 지시로 끌려가 고문당한 국회의원 13명 ; 김대중, 김영삼, 양일동 등과 고문 피해자, 뉴서울호텔에서 내외신 기자회견 (남산의 부장들 2, 168쪽)
“물고문에 통닭구이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인간적인 수모도 잊을 수가 없어요. 고문실에 들어서자마자 ‘이 새-끼가 최형우야. 겁 대가리 없는 놈이라더니 인상 참 더럽게 생겼구만’이라며 발길질을 퍼붓더군요. 그리곤 발가벗겨놓고 핀셋으로 내 성기를 톡톡 두들기거나 마구잡아당기더라고요. 내가 그래도 국회의원인데 참…나만 잡아 간 게 아니예요. 내 아내는 폐렴에 걸린 아들을 업은 채 부산보안부대로 끌려가 보름동안 온갖 수모를 겪었지요. 내 지구당원들도 유신 비난 삐라를 뿌렸다는 이유로 잡혀가 고문을 심하게 당했어요. 유신은 그렇게 미쳐 날뛰었어요”-최형우 의원 증언
② 월남 패망 : 베트남 통일(75.4.30)
③ 코리아게이트(1976~78.10) : 박동선 뇌물, 김형욱 미 의회 증언, 회고록 출간
*1975년 6월 도널드 M. 프레이저 의원에 의한 하원의 한국에 대한 인권청문회에서 전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던 이재현이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단지 미국 내에서 반한파(反韓派)에 대한 인권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반박정희 여론과 활동을 무마하기 위해 대규모 회유, 매수, 협박,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폭로
*미국 의회 국제관계위원회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미국 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1976년 미국 언론에 의해서 공개되었다. 1976년 10월 24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박동선과 한국의 중앙정보부 등이 미국 국회의원과 공직자들에게 의회 내에 친한(親韓)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1970년대 들어 매년 50만 달러에서 1백만 달러에 이르는 현금을 포함한 뇌물을 뿌렸다고 보도했다.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도 알려진이 박동선 로비사건은 인권문제와 함께 한미관계에 치명적인 사건이 되었다.
④ 김상근 망명(1976. 11. 24) : 워싱턴 김한조와 중정 본부 연결고리 단절
(3) 위기 돌파 특약 처방 : 박정희 직접 석유 사기(1976년 1월 15일 연두기자회견)
포항에 유전이 있다는 이야기가 1960년대에도 나돌았는데, 1966년 정부에서 무임소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했다. 조사단은 '지질학적으로 경제성 있는 가스나 석유부지는 없다고 본다. 그렇지만 구멍을 한 번 뚫어보는 건 바람직하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여기서 석유는 안 나왔다. 그래서 조사단에서는 포항에는 가스를 포함해 유전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프레시안>,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59)
① 중앙정보부(신직수) 석유공작팀 특별 석유탐사단(단장-국장) 발족(1975.4)
② 링거병 원유는 칼텍스 실험 결과 경유로 판명
③ 박정희 원유에 불붙이는 쇼까지 연출
④ 1976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영일만에서 양질의 석유 나왔다”고 뻥
⑤ <유신 반대→유신 용꿈> 기획 작품 : ‘유신 춘몽’으로 끝나
1976년 1월 15일자 <경향신문>
(4) 유신체제 안정시킬 해결사 기대
① 건설부장관 : 경제 위기 돌파
② 유신체제 위기 돌파 기대
5) 김재규의 모순 해결 방법
(1) 생각과 행동의 모순 : 생각-유신 반대, 행동-유신 참여
***재벌 거부, 재벌 취직
(2) 선택 : ‘유신 핵 제거’냐 ‘체제 내 개혁’이냐 오락가락
(3) 마지막 선택 : 부마항쟁→박정희 사살
3. ‘보이지 않는 혁명’
1) 중앙정보부 혁신
(1) 고문 단절 : 남산 고문실 폐쇄(확인 못함)
① 고문 증언이 전혀 없다.
② 대부분 신사적 대우 증언
송기숙 전남대 국문과 교수는 1978년도에 소위 ‘교육지표’ 사건에 연루되 동료교수 11명과 함께 남산의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송기숙 교수는 ‘죽을 고문을 당할 각오를 했는데, 수사관이 상부의 지시라며 의외로 부드럽게 조사를 받드니 그냥 풀어줬다’고 말했다. 송교수는 한 동안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10.26이 나자 ‘아하 싶었다’고 말했다. (주간 중앙 1993년 10월 25일자)
(2) 간첩조작 단절
① 신직수 중정(73.12~76.12) : 문인간첩단사건(74.1. 문인 5명), 울릉도간첩단사건(74.3. 47명, 3명 사형집행), 1∙2차 모국 유학생 간첩단 사건(75. 21명), 76년 3명 ; 총 직접 피해자 76명
② 김재규 중정(76.12~79.10) : 간첩 사건 없음
③ 보안사 : 77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6명)
(3) 총선 불개입→가장 공정한 선거
김재규는 또 중앙정보부에 정치간여를 되도록 억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 예로 야당인 신민당이 집권당인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1.1% 앞섰던 1978년 12.12 선거를 들 수 있다. 그는 중앙정보부는 총선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인데, 총선이 끝나자 공화당에서 굉장한 반발을 하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김대곤, 김재규 X파일, 68~69쪽) 12.12총선이 유신이라는 철권통치 하에서도 역대 국회의원선거 중 가장 공정했던 총선으로 지금까지 평가받고 있다는...(정병진, 궁정동 총소리, 165쪽)
(4) 역 정치공작 : 민주 인사, 민주화운동 지원
(5) 중정 구조 개혁 : 생략(이정식, 42~43쪽)
(6) 보이지 않는 중정 혁명 : 천황 돌격대→민주 정보부
2) 민주 인사, 민주화운동 지원
(1) 취임사
중앙정보부가 이제까지 국민에게 나쁘게 보인 점이 있다면 이를 씻고 국민의 신임을 받는 기관이 되자. (김대곤, 김재규 X파일, 67쪽)
(2) 취임 직후 민주 인사 지원
김재규씨가 1976년 12월에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이래로 특기할만한 일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들어본다면 1977년 1월 15일에 김지하 시인의 1년 10개월만의 가족면회 김철 통일사회당 고문의 석방(3월31일), 민주구국헌장 지지서명운동 관련자들의 석방(5월10일), 긴급조치 9호위반으로 복역하던 신부 목사 학생 등 14명의 석방(7월17일), 같은 일로 구금되었던 시인 고은 등의 석방(10월29일), 구국선언사건 관련자 11명의 석방(12월31일) 등을 들 수 있다. (이정식, 인간 김재규, 40~41쪽)
(3) 김대중 서울대병원 이감
친척들이 회고하는 일들 중에 이런 일화가 있다. 하루는 김재규씨가 매우 좋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모친에게 “어머니 기분 좋은 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추운데 감방에서 수고하는 분 한분을 더운 곳으로 모셨습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 날이 1977년 12월 19일로서 진주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김대중씨를 서울대학교 병원으로 이송한 날이었다. (이정식, 인간 김재규, 41쪽)
(4) 김영삼 총재 당선 결정적 지원
그는 또 강경 김영삼 전 총재가 중도통합론의 이철승 대표를 누르고 신민당의 총재로 선출된 1978년 5.30전당대회 때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5월 29일 밤 당시 연금중인 김대중씨의 활동을 방임하여 그가 김영삼 측 단합대회에 참가케 함으로써 김영삼 돌풍을 일으켜 이를 그 이튿날 전당대회장으로 연결시켰다는것. 그는 그 후에도 간부들을 모아놓고 신민당에 대해 너무 간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대곤, 김재규 X파일, 69쪽)
(5) 김 추기경-가톨릭(민주화운동 구심, 명동성당) 우호-협력 관계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를 방문하겠다고 했으나) 그러나 김재규 부장은 자기가 가서 그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예의에 맞는 일임을 고집하여 김추기경을 예방하고 그 후 지학순 주교를 석방할 뿐더러 (1977년) 12월에는 그로 하여금 일본, 구라파, 바티칸 등의 여행을 하는데도 편의를 도모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도 김재규 부장은 김추기경과 친교를 맺었다고 하는데 역대 중앙정보부장 중에서 추기경을 예방한 부장이 없었다고 한다. (이정식, 인간 김재규, 41~42쪽)
당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일면 투쟁해온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은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를 좋게 보는 발언을 했다. 물론 성직자로서 사람을 죽인 것을 두둔하지는않았지만, 의로운 일을 했음을 시사하는 말을 많이 했다. 가톨릭 계통에서 김재규의 구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김재규는 죽기 전에 부인 김영희에게 "내가 죽으면 승려가 되라"는 유언을 했는데 김재규의 부인은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아마 가톨릭에서 구명운동을 해준 영향 때문이라고 본다.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가며 독재와 유신의 사슬을 끊어준 김재규의 행동을 높이평가 했다. 그리고 김재규가 사형될 때까지 끝까지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 가족들이 추기경을 만나 구명을 요청할 때도 "할말이 없습니다"라는 짧은 말로 응 대했다.(Break News, 강신옥 인터뷰, <박정희 살해는 김재규 명예혁명이었다>, 2007.4.29)
(6) 학생 구속 반대
그는 학생구속에 대해서도 당시 권력 주변의 인물들과는 궤를 달리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당시 문교부 장관을 세 번 씩이나 찾아가 학원대책을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또 학생구속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당시 대학 교수로 있던 그의 친척은 1978년 5월경 김재규를 만나 정부의 학생구속을 비난하고 석방을 촉구하자, 학생구속은 자기로서도 원치 않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조속한 시일 내에 석방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X-68
3) 4차례 박정희 제거 기도
(1) 1차 : 유신 직후 3군단장(71.9~73.3)
(2) 2차 : 건설부장관(1974.9) 발령장
① 박정희 쏘고 자결.
② 유서 5통 : 국민, 어머니, 집사람, 딸, 남동생
③ 4면에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적어 넣은 태극기
(3) 3차 : 75년 초도 순시 때도 결심 마음약해져서 실행하지 못함.
(4) 4차 : 중앙정보부장 시절 혁명기도(1979년 4월)
피고인은 박대통령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도) 우리 3,700만 국민에게 민주회복이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을 거란 것을 곰곰히 생각한 끝에 피고인이 민주회복 국민혁명의 지도자가 되어 혁명을 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에 확실한 민주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으로 보고, 1979년 4월부터 피고인의 생각으로는 이조시대부터 2인 이상이 혁명을 하여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는 것이고 더욱 유신체제 하에서는 그 보안유지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피고인 혼자서 박대통령을 살해한다, 장소는 궁정동, 때는 박정희의 만찬 시로 하여 혁명할 수 있는 기회를 보고 있다가 1979년 4월, 마침 박대통령이 궁정동 가동에서 만찬한다고 연락을 받고 그날도 이번 거사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3군 참모총장들을 궁정동으로 불러놓고 3군 참모총장들에게는 박대통령과의 예기치 않던 만찬으로 그곳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김학호 감찰실장으로 하여금 3군 참모총장들을 모시게 하고, 피고인은 박대통령의 만찬에 참석하였다가 당시에는 대통령의 주변 경호가 삼엄하다고 판단되어 그날 결행을 포기한 사실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89쪽)
① 정승화 그날 상황 정확하게 기억 (정승화 회고록,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31쪽)
② 5월 20일 혁명의지 다시 다지며 붓글
4. 10.26 민주혁명, 김재규 혁명
1) 붓글 : 민주혁명 의지
(1) 1979년 5월 20일에 쓴 붓글
(2) 변호사 설득 위해
김재형, 이돈명, 강신옥,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안동일(항소이유서 제출 변호인)
*안동일,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
民主 民權 自由 平等 - 己未年 春三月 金載圭
自由民主主義
爲大義 - 一九七九年 金載圭
爲民主正道 - 一九七九年 金載圭
非理法權天
(3) 붓글 쓴 꼭 1년 후 1980년 5월 20일 대법원 사형 확정, 5월 24일 교수형
2) 부마항쟁 인식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 봉기로서 시민이 데모 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 대의 경찰차와 수 십 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저항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5대 도시로 확산 전망)
(중 략)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나’하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박대통령의 이와 같은 반응은 절대로 말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본인의 판단이었습니다. 박대통령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압니다. 그는 군인 출신이고 절대로 물러설 줄을 모르는 분입니다. (김재규의 항소이유보충서)
3) 거사 결심
거사 3일 전인 10월23일, 김재규 부장은 친척중의 두 분을 장충동 공관에 불러서 평소에 자기가 써놓았던 붓글씨... 등을 가리키며 나의 말을 잘 들어주고 내 말을 후손들에게 잘 전달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고 한다. (중략) 그 말을 들은 친척들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한채 오리무중에 싸여 집에 돌아갔는데 10.26사건이 일어난 후에야 그날의 말의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또, 친척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재규 부장은 거사 전날인 25일에 그의 선조인 김문기의 묘에 가서 손수 벌초를 하고 오랫동안 묵묵히 참배를 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선조는 1455년에 단종을 섬기다가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를 한 후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참살된 유명한 사육신 또는 사칠신의 하나였다. 대의를 위한 자기의 모사를 앞두고 선조에 고하려 갔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정식, 58쪽)
4) 혁명의 목적
(1) 다섯 가지 목적
① 자유민주주의 회복 : 헌법 제1조 실현의 핵심 과제
② 국민의 희생 방지 : 국가의 1차적 존재 목적
③ 적화 방지 : 공산화→독재 예방도 정당
④ 한미관계 회복 : 당시 최고의 국제-안보 과제
⑤ 한국인의 명예 회복 : 조선을 보라!
(2) 방법 : 박정희 사살
5) 김재규 혁명, 10.26 민주혁명
(1) 초미니 민주혁명 : 김재규 혁명~10.26 민주혁명
① 김재규의 ‘위대의’ 박정희 사살-자기희생 결정
② 거사 30분 전 부하에 협조부탁 : 모두 흔쾌하게 참여
③ 수습을 위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만 초청
④ 최소 희생으로 ‘국민의 대규모 희생’을 막고, 유신체제 타도→자유민주주의 문
(2) 천황체제 타도 : <북한화=수령체제=김일성 신국체제>를 막았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50분 경, 궁정동 아방궁(안가) 연회장,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향해 쏜 총알 두 발, 그것은 1945년 미국이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탄 두 발보다 ‘역사적 위력’이 훨씬 컸다.
원자폭탄은 미국이 세계패권을 노리고 다 끝난 전쟁에다 퍼부은 반인류적 범죄였다. 이건 일본제국의 범죄보다 더 악질 범죄다. 아무리 적국이지만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어떻게 원자폭탄을 시험삼아 투하할 수 있단 말인가?
김재규는 단 두 방의 총으로 「다카키 천국」을 무너뜨렸다. 나는 박정희 사살 사건을 8.15 민족해방만큼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한다. 일본제국보다 몇 배나 악독한 「다카키 천국」을 가장 피를 적게 흘리고 타도했기 때문이다.
(중 략)
박정희를 죽이지 않고는 안보자궁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었다. 만약 박정희가 사살되지 않고 자연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멀리 볼 것 없이 1994년 김일성 죽은 후의 조선(북한)을 보면 거기에 우리의 모습이 있다.
지금쯤 박정희를 기념하는 「다카키 신궁」 참배가 의무화되었겠지? 박정희 아니면 어떤 새끼 박정희가 안보자궁 위에 올라타고 채찍을 휘두르고 있겠지? 우리는 비상구도 탈출구도 없는 안보자궁에서 “위대한 영도자 만세!”를 부르며 살고 있겠지?
최소 백 명 이상 여인들을 「성폭행 자궁」에 가둬놓고 성폭행 했고, 수천 명을 「고문 자궁」에 가둬놓고 족쳤고, 전 국민을 「안보 자궁」에 가둬놓고 공포에 떨게 했던 야수,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영웅 김재규! 그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던져 ‘민족적 속’을 지켜낸 영웅이다. 그의 명복을 빌면서 나는 김재규의 말을 다음과 같이 고치고 싶다.
김재규는 인간의 마음으로 야수를 쐈다. ‘민족적 약속’인 민주공화국을 위해!
(최상천, 알몸 박정희(2001), 288~289쪽)
(3) 김재규 혁명, 10.26 혁명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평가는 다음 기회에
6) 혁명 성공
(1) 유신의 핵 제거→유신헌법 폐지→천황체제 타도
(2) 악마는 퇴치, 악당은 그대로
① 신군부 탐욕
② 양김 탐욕
③ 과거 청산 제대로 안 된 민주화 : 매독 퇴치, 중앙정보부-국정원 혁파, 재벌 해체
④ 아직도 새끼 박정희가 우글대는 나라
(3) 민주공화국 완성은 우리 모두의 몫
5. 육의사(六義士)를 기리며
1) 대인 혁명가 김재규
(1) 대인 혁명가 : <爲大義>, <爲民主正道>라는 국가적 대의(자유민주주의 회복, 국민 희생차단)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서 살신성인
(2)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혁명대의 설파
강신옥 인터뷰(2007), <박정희 살해는 김재규의 명예혁명>
-김재규의 변호를 어떤 경유로 맡게됐나?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가 사망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나로서는 원하는 바 였다. 소원을 풀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시저를 살해한 부르터스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박선호 가족들이 나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그뒤 가톨릭 김수환 추기경 쪽의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김재규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황인철, 홍성우, 이동명, 임광규 변호사 등이 김재규의 공동변호를 맡게 됐다. 그 후 자원 변호사 20여명이 김재규 변호를 하겠다고 나섰다. 일부 변호사들은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해 자원변호사를 자청한 이들도 있었다. 김재규가 이 점을 눈치 채고 변호거부를 선언했다. 김재규는 "나 혼자서도 혁명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박선호 변호인이었기 때문에 1심을 마칠 때까지 김재규의 재판에 참관할 수 있었다.
(3) 모진 고문, 엉터리 재판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대인 풍모
(4) 절제력, 대의에 충실한 의연한 모습 : 박정희 ‘여성 편력’ 폭로는 막고 나선다.
(5) 착한 대장부 : 부하 선처 간절하게 요청
(6) 정말 깨끗한 사람
김재규는 1980년 5월에 사형됐다. 그가 죽인 이후, 지난 28년간 김재규와 관련된 이렇다할 부정적인(네거티브) 정보는 없었다. 깨끗했다. 내연여로 알려진 a여인이 있었다. 그는 아들이 둘 있었다. 김재규의 아들이라고 우겨, 유전자 검사까지 했다. 김재규의 아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강신옥 인터뷰, <박정희 살해는 김재규의 명예혁명>)
***김재규 혁명가, 김대중 김영삼 정치가, 노무현 혁명적 정치가
2) 대한민국 육의사
(1) 김재규
(2) 박선호
(3) 박흥주
(4) 이기주
(5) 유성옥
(6) 김태원
3) 꼭 전해 드리고 싶은 말
<<그 사람>>
인연과 의리 - 김재규와 사람들(김정남)
1988년 봄이었을 것이다. 행당동 산꼭대기 박흥주 대령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단지 군인 신분이었던 탓으로 그는 3심에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1980년 3월 6일, 시흥시 소래의 야산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 때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있었다. 큰 딸이 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김재규 구명운동을 주도했던 사제단에서는 박흥주의 큰 딸이 대학에 갈 때에 등록금으로 쓸 수 있도록 산업은행에 돈을 예탁해 놓은 것이 있었다. 그 돈을 전해주러 가는 길이었다.
현역 육군 대령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의 비서관이 달동네 13평짜리 집에 살고 있었던 그의 청빈은 재판과정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었다.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하다 말고 달려온 그 부인은 한사코 그 돈을 받지 않으려 했다. 가지고 갔던 예탁증서를 던지듯 그 부인의 손에 쥐어주고, 그 산동네 골목길을 내려왔다.
나와 박흥주 대령과의 인연은 이것이었지만, 내가 박흥주 대령을 위하여 나름대로는 좋은 일을 했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상당기간 살아왔다. 그런데 작년에 그런 내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는 일을 겪어야 했다. 10․26사태와 관련한 자료를 뒤지다가, 우연히 박흥주가 그 가족에게 보낸 유언을 보게 된 것이다. 사실상 그의 사형이 확정된 뒤인 1980년 2월 2일자로, 그가 그의 아내와 두 딸에게 보낸 편지는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했던 것이다.
두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아빠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다. 주일을 잘 지키고 건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라”고 하였다. 아내에게는 “아이들에게 이 아빠가 당연한 일을 했으며, 그 때 조건도 그러했다는 점을 잘 이해시켜 열등감에 빠지지 않도록 긍지를 불어넣어 주시오. …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요. …
의연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면 되지 않겠소?”라고 말을 남긴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우리 사회가 죽지 않았다면 우리 가정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거요”한 바로 이 대목이 내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그 가족을 위하여 과연 우리 사회가 해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내가 해 준 것이 또 무엇이 있던가. 나는 나 자신 그동안의 자기 위안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그 일을, 그리고 그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공동선 통권 75호)
김재규 유언 : 1980년 5월 23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그래서 나는 아무 누구의 염려 없이 아주 유쾌하고 또 명예스럽고 또 이런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했다는 그 자부와 내가 이렇게 감으로서 자유민주주의는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이러한 또 확신과 이걸 가지고 나는 즐겁게 갑니다. 아무쪼록 대한민국에 무궁한 발전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영원한 그러한 발전과 10.26민주회복혁명, 이 정신이 영원히 빛날 것을 저는 믿
고 또 빌면서 갑니다.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마음껏 만끽하십시오.
6. ‘광복절=분단절’과 ‘탕탕절=혁명절’
당신은 탕탕절을 어떻게 보내시렵니까?
출처 : BAND 최상천의 사람나라 https://band.us/n/a1a2Xfw1C4xeR
댓글 없음:
댓글 쓰기